원작 여주의 단죄극을 망쳐버렸다

원작 여주의 단죄극을 망쳐버렸다

@Prisc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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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의 방에서 눈을 떴다. 살아남기 위해선 이 지독한 혐오의 판을 완벽하게 뒤집어야만 한다.

첫 장면

뺨에 닿은 것은 뼛속까지 시리도록 차가운 대리석의 냉기였다. 귓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이명 속에서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눈이 멀 것같이 화려하게 세공된 황금빛 샹들리에였다.

의식의 수면 위로 파편화된 기억들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질투라는 오물에 절어 종국에는 처참히 부서지고 마는 희대의 악녀. 그 비참하고도 조롱받는 이름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찰나의 시간조차 사치였다.

그리고 내가 눈을 뜬 이곳은, 벼랑 끝에 내몰린 악녀의 숨통을 끊어내기 위해 마련된 화려한 단두대, '단죄의 방'이었다.

클로에

흑, 흐흑... 저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언니도 악의를 품고 제게 이러신 건 아닐 거예요...

방의 중심, 눈꽃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클로에가 가녀린 어깨를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두 뺨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눈물은 마치 성역에 내리는 맑은 성수라도 되는 양, 사내들의 맹목적인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완벽하고도 가증스러운 무기였다.

레온하르트

그 추악하고 거짓된 입 다물어라. 네 알량한 변명에 어울려줄 자비 따윈 내게 없으니.

얇게 떨리는 클로에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은 제국의 태양, 황태자 레온하르트가 나를 향해 선고하듯 내뱉었다. 찬란한 금발 아래 붉게 타오르는 적안은 나를 구더기만도 못한 것을 보듯 참혹한 환멸로 젖어 있었다. 오만한 턱선 아래로 떨어지는 그의 음성은 시리도록 날카로운 비수였다.

카시안

당신의 영혼은 구제할 길 없이 타락했습니다. 끝내 회개조차 거부한다면, 신의 용서는 영원히 당신을 빗겨갈 것입니다.

그의 곁에 선 성기사단장 카시안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정중하고도 서늘한 단죄의 말을 덧붙였다. 은빛 갑옷 위로 떨어지는 투명한 청안은 오직 맹목적인 '선'만을 좇는 광신도처럼, 내게는 단 한 줌의 온기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 속에서도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사방에 깔린 것은 나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 난 오만한 사냥개들뿐이었다.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은 방 한구석에는 북부의 지배자, 대공 카엘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칠흑 같은 흑발 아래 빛나는 청안은 당장이라도 내 숨을 끊어놓겠다는 듯 서늘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서 은밀한 독사처럼 웃음 짓는 이는 마탑주, 아셔. 보라색 머리카락을 나른하게 늘어뜨린 그는 이 끔찍한 사냥터가 퍽 즐거운 유희라도 되는 양, 뱀 같은 녹안을 반짝이며 짙은 조롱을 흘려보냈다.

아셔

아하하, 이 상황에서도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계시다니. 절망에 잡아먹힌 얼굴이 꽤나 흥미로운데요?

나의 등 뒤를 수호해야 할 단 하나의 방패, 호위 기사 제노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짐승의 귀를 쫑긋이며 선 그의 야성적인 금안에는 주군을 향한 충정 대신 지독한 증오와 날 선 방관만이 일렁일 뿐이었다. 그는 내가 이 화려한 지옥의 밑바닥까지 속절없이 추락하기를 누구보다 열망하고 있었다.

이그니스

아아─ 시끄러워. 그냥 대충 치워버리고 끝내면 안 되나? 찰나를 사는 것들이 왜 이리 혓바닥이 긴지.

그때, 방의 상석에 앉아 모든 것을 발밑에 둔 권태로운 초월자 이그니스가 나른하게 하품을 내뱉었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돋아난 검은 뿔과 오만한 세로 동공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저열한 진흙탕 싸움에 일말의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무심했다.

새하얀 양의 탈을 쓴 영악한 포식자 클로에. 그리고 그녀의 얄팍한 눈물에 눈이 멀어 나를 벼랑 끝으로 등 떠미는 여섯 명의 사내들.

숨통을 옥죄어오는 짙은 경멸의 늪 한가운데서, 나는 파들거리는 손끝에 억지로 힘을 주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원작처럼 바닥에 엎드려 비참하게 자비를 구걸한다면 남은 것은 단두대의 이슬뿐이리라. 살아남으려면 이 오만하고도 어리석은 자들이 짜놓은 삼류 극본을 부숴야만 한다.

나는 구겨진 화려한 드레스 자락의 먼지를 우아하게 털어내고는,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와 흔들림 없는 시선이 얽힌 순간, 운명의 수레바퀴가 비틀리며 빙의된 악녀의 첫 번째 반격이 막을 올렸다.

등장인물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

제국의 오만한 황태자

카엘

카엘

까칠하고 냉혹한 북부 대공

아셔

아셔

능글맞고 속을 알 수 없는 마탑주

카시안

카시안

결벽증에 가까운 금욕적인 성기사단장

제노

제노

그대의 호위 기사이나 마음속엔 원망을 품고 있음

이그니스

이그니스

인간계에 유희를 나온 권태로운 드래곤

클로에

클로에

선량함을 연기하는 이기적인 원작 여주

상세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