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가을바람이 빈 그네의 녹슨 쇳소리를 실어 나르는 늦은 오후였다. 주황빛으로 짙어지는 볕이 공원 바닥 위로 긴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하라는 모래밭 가장자리의 나무 울타리 옆에 서서 세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른 체형 위로 헐렁한 무채색 옷을 걸친 채였으나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세운 허리는 단단한 심지를 연상케 했다.
아이들의 작은 운동화 밑에서 마른 모래 알갱이가 바스락거리며 흩어졌다. 낮에 삼킨 약 기운 탓에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바람 끝에는 마른 낙엽 냄새가 옅게 섞여 있었다. 하라는 미세하게 떨리는 오른손을 외투 주머니 깊숙이 넣어 몸 옆에 고정했다. 오른쪽 시야 끝으로 몇 걸음 떨어진 벤치에 앉은 그대의 기척을 확인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때 동생들과 모래밭을 가로지르던 다섯 살 연우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나무 경계석에 운동화 앞코가 걸리는 순간 작은 몸이 균형을 잃고 그대가 앉은 벤치 발치로 고꾸라졌다.
차갑게 식은 바닥에서 짧은 울음소리가 터지자마자 하라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거친 흙바닥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자 긴 바지 밑단이 모래에 스치며 바스락거렸다. 고개를 숙여 아이를 살피는 사이 목 끝까지 여몄던 높은 셔츠 깃이 옆으로 느슨하게 벌어졌다. 그 틈으로 목덜미부터 쇄골까지 흉측하게 얽힌 화상 흉터가 희게 도드라졌다.
고하라
연우야. 다쳤어? 엄마 봐.
마른 금속을 낮게 문지르는 듯한 목소리가 바닥으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약간의 쇳소리가 섞인 낮은 음성에 날카로움이 옅어지자 울음을 터뜨리려던 연우가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하라는 주머니 속의 오른손은 그대로 둔 채 뼈마디가 도드라진 왼손만 뻗어 아이의 손바닥을 쓸어냈다. 거친 모래알이 털려 나간 작은 손바닥 위로 붉게 쓸린 자국만 옅게 남았다.
머리 위쪽에서 가방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들렸다. 벤치에 앉아 있던 그대가 밴드를 꺼내 건네려다 허공에서 흠칫 손을 멈췄다. 하라는 왼손으로 아이의 손목을 감싸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연히 마주친 잿빛 눈동자는 깊은 물밑처럼 고요해서 마치 모든 감정이 증발해 버린 듯했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저녁볕이 창백한 뺨과 눈가를 가로질렀다. 낮게 묶은 검은 머리칼에서 흘러내린 옆머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왼쪽 눈가가 드러났다. 노을빛을 머금은 오른쪽 눈과 달리 초점이 미세하게 늦게 따라붙는 왼쪽 눈은 저무는 볕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유리구슬 같았다. 기묘한 위화감이 감도는 사이 불쑥 내밀어진 그대의 손끝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하라는 타인의 시선이 왼쪽 눈과 벌어진 옷깃에 닿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미세하게 틀었다. 곧바로 입을 여는 대신 이삼 초간 침묵 속에서 내밀어진 밴드와 그대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주머니 속에 감춘 오른손 끝이 둔한 통증으로 작게 떨렸으나 창백한 낯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불쑥 내밀어진 타인의 호의를 짧게 응시하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하라
괜찮습니다.
고저가 없는 건조한 음성이 두 사람 사이의 서늘한 공기를 갈랐다. 피가 날 만큼 깊은 상처가 아니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고 입안에 삼켰다. 하라는 왼손 하나로 연우를 안아 일으킨 뒤 손을 옮겨 벌어진 셔츠 깃을 목 끝까지 여몄다.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그대의 손끝에 시선을 잠시 두었다가 빈 그네의 쇳소리가 메우는 침묵 속에서 상대의 다음 기척을 기다렸다.